요즘 룸메와 같이 플로깅을 하고 있다. 플로깅은 조깅도 있어야 하니 완전한 플로깅이라고 할 수는 없고 쓰줍이다. 시간 좀 나는 날에 산책 할 겸 기숙사 근처 골목과 강에서 쓰레기를 줍는다. 대략 올해 1월부터 시작했다.
인스타 계정도 만들었다. 무작정 '쓰레기 줍는 계정'을 떠올리고 줄이니 쓰줍계, 왠지 '게' 같으니 '쓰줍게'로 만들었다.
https://www.instagram.com/ploggingcrab/
우리 쓰줍게.
밴드 <언니네이발관>의 이석원은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5집 <가장 보통의 존재>를 작업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내가 작지 않은, 주체임을 깨닫는 것도 가능할것이다.기숙사 주변 동네는 원룸들과 오래된 주택들이 뒤섞여있다. 혈관처럼 복잡하고 좁은 골목들, 칠한 지 오래된 담벼락. 나 또한 그 골목을 발걸음 재촉하며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쓰레기 몇 개가 뒹굴기 시작하면 며칠 뒤엔 그 위로 또다른 쓰레기와 담배꽁초가 자리를 틀곤 했다. 그 때문인지 좁은 골목은 더 을씨년스러워보였다. 원래는 그 모습과 쓰레기 버린 사람들에 짜증내며 지나갈 뿐이었는데 2학기 기말고사를 마친 직후 지나다니며 쓰레기 보면 기분도 별론데 내가 좀 치우면 조금 나아지려나 싶어 산책할 겸 봉투를 들고 나가 쓰레기를 좀 주웠다.
자주 다니던 골목길 따라 20분 정도 가볍게 쓰레기를 주웠는데 줍고 보니 생각보다 쓰레기를 많이 치운 것이었다. 그 때 나 스스로가 ‘실천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쓰레기 굴러다니던 불편한 환경은 막연히 너무 커서 내가 뭘 좀 한다고 별 영향도 없다 느끼며 무기력하게 지나칠 뿐이었다. 그러나 내 행위로 눈 앞에서 생각보다 많은 것이 달라지는 것을 보니 내가 세계와 연결되고 그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작지 않은, 실천할 수 있는 존재란 걸 보게 된 것이다.
로스쿨 생활은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이다. 배우는 것은 방대하지만 그건 내 직업적 실력과 내 시험 통과를 위한 것으로, 나를 향해있다. 대학생활과 달리 거의 공부에만 몰두하니 3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의 나만을 위해 사는 것이다. 동시에 성취감을 도무지 주지 않는 가혹한 커리큘럼이라 고립된 자아는 작아지기까지 한다. 로스쿨생들이 우울증을 많이 앓는 것도 단지 공부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적으로 깊이 숨어들기만 하는 작은 자아로 오래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별 생각 없이 시작한 쓰줍이지만 그 시간 동안 내가 나를 넘어 내 주변의 세계와 연결되고, 그 세계를 바꿔나가는 큰 존재인걸 실감할 수 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쓰레기 줍는 것만 하는 건 아니고, 로스쿨생답게 법적인 관점을 생각해보거나 정책을 분석해볼 수도 있다. 3학년이니 여유가 아주 많은 것은 아니지만 공부하다가 유튜브 보느라 시간 보내는 것보다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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