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2020. 8. 27. 선고 2015도9436 전원합의체 판결
형법 제302조(미성년자 등에 대한 간음)
미성년자 또는 심신미약자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형법 제302조의 미성년자 등에 대한 간음은 미성년자 또는 심신미약자(이하 미성년자 등)를 위계나 위력으로 간음 추행하는 때에 성립하는 범죄이다. 주된 논의는 미성년자에 집중되어 있는데 위계 또는 위력으로 만 13세 미만인 자를 간음 추행한 때에는 형법 제305조의 미성년자의제강간등죄가 적용되므로 실질적으로 이 죄는 13세 이상 19세 미만인 미성년자에 한정된다.
형법 각론 공부 중에 이 죄에 나름의 최신판례가 붙어 있고 교수님이 언급하셨고 판례의 논지가 의미있게 느껴졌다. 이 죄는 수험적 중요도는 낮은 편이다. 아마 객관식 선지 하나 정도로 나올 수 있을까. 사례형 문제에서도 메인은 될 수 없고 사안에 따라 간단한 목차 하나 정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판례의 의의를 따라 기존 해석과 연관지어서 법률의 체계적 해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의의
이 판례의 의의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이전 판례의 태도를 알아야 한다. 이건 전원합의체 판결이고 그 전의 법 해석을 변경한 것이다. 종례의 판례는 위계에 의한 착오를 간음행위 자체에 대한 착오로 한정시켰다.(2001도5074) 즉 피해자가 간음행위 자체를 착오해야 한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피해자에게 병원놀이를 하자고 하면서 사실은 간음 추행하는 것처럼 간음행위 자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피해자여야 했다. 반면 피해자가 간음행위가 무엇인지 알고 이 행위가 간음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가해자에게 속는 바람에 그 간음행위에 이르게 된 동기에 착오가 발생한 경우에는 이 죄가 성립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교의 대가로 돈을 주겠다고 속이고 간음하는 경우에는 단지 동기에 기망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이 죄로 처벌할 수 없었다. 즉 위계를 좁게 해석한 것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는 성교에 대한 사리판단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피고인으로부터 성교의 대가를 받기로 하고 스스로 성교행위에 나아간 것이므로 공소사실 기재와 같이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성교의 대가로 50만 원을 줄 의사나 능력이 없으면서도 위 돈을 주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피해자가 이 말에 속아 피고인과 성교행위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사리판단력이 있는 피해자에 관하여는 그러한 금품의 제공과 성교행위 사이에 불가분의 관련성이 인정되지 아니하는 만큼 이로 인하여 피해자가 간음행위 자체에 대한 착오에 빠졌다거나 이를 알지 못하였다고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피고인의 행위가 특별법 제10조 제4항의 '위계'로 청소년인 피해자를 간음한 것에 해당하지 아니한다고 판단하였다.
대법원 2001. 12. 24. 선고 2001도5074 판결
그러나 2015도9436 판례는 견해를 변경하여 피해자가 오인 착각 부지에 빠지는 대상이 간음행위 자체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위계에 의한 간음죄에서 ‘위계’란 행위자의 행위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피해자에게 오인, 착각, 부지를 일으키게 하여 이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위계의 개념 및 성폭력범행에 특히 취약한 사람을 보호하고 행위자를 강력하게 처벌하려는 입법 태도, 피해자의 인지적·심리적·관계적 특성으로 온전한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를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 등을 종합하면, 행위자가 간음의 목적으로 피해자에게 오인, 착각, 부지를 일으키고 피해자의 그러한 심적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의 목적을 달성하였다면 위계와 간음행위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고, 따라서 위계에 의한 간음죄가 성립한다. 왜곡된 성적 결정에 기초하여 성행위를 하였다면 왜곡이 발생한 지점이 성행위 그 자체인지 성행위에 이르게 된 동기인지는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침해가 발생한 것은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하기 어렵다. 피해자가 오인, 착각, 부지에 빠지게 되는 대상은 간음행위 자체일 수도 있고, 간음행위에 이르게 된 동기이거나 간음행위와 결부된 금전적·비금전적 대가와 같은 요소일 수도 있다.
대법원 2020. 8. 27. 선고 2015도9436 전원합의체 판결
판례의 사실관계
1) 피고인은 채팅으로 만나게 된 14세의 피해자에게 자신을 ‘고등학교 2학년인 A’라고 속이고 치탱으로 피해자와 사귀기로 하였다.
2))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자신 A를 좋아해서 스토킹을 하는 여성이 있어 헤어져야 할 수도 있다고 거짓말하면서 그 여성을 떼어내려면 자신 A의 선배와 성관계하면 된다고 속였다.
3) 피해자는 피고인과 헤어지는 것이 두려워 피고인의 제안을 승낙했고, 피고인은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자신이 ‘A의 선배’인 것으로 행세해서 피해자를 간음하였다.
* 사실관계에서 보듯이 피해자는 간음행위 자체는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쟁점이 되었다.
판례의 타당성
이제 막 형법을 끝마쳤지만 교과서 내용, 교수님의 설명, 판례의 판시 등을 종합해 볼 때 나름의 판례의 타당성을 분석할 수 있었다. 가장 큰 것은 종래 판례 태도에 불합리한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종래 판례 태도의 불합리한 점은 2가지다. 첫째는 본 취지일 의사결정능력이 취약한 미성년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에 미흡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다른 죄들과의 체계적 정합성 문제다.
1. 미성년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
성행위는 악한 행위도 아니고 금지되어야 할 것도 아니다. 자유로운 개인의 의사에 따른 성행위는 국가가 개입할 영역이 아니다. 그럼에도 본 죄와 같이 미성년자 등에 대한 위계 간음죄를 처벌하는 취지는 분명히 성년에 비해 의사결정능력이 미약하고 기망당하기 쉬운 미성년자 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간음행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피해자인 미성년자 등을 속여서 간음행위 하는 것은 분명히 가벌성이 있다. 자신의 행위 대상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점에서 의사 형성 자체에 하자가 있고, 이는 자유로운 의사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간음행위 자체는 인식하고 있어도 기망으로 간음행위에 이르게 된 미성년자 등이 보호 대상에서 빠져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찾기 힘들다.
물론 두 행위태양은 분명히 다르고 간음행위 자체를 이해 못하는 자를 기망해 간음하는 것이 비난가능성이 더 높으므로 달리 취급할 수도 있는 것도 옳다. 그러나 개인의 사생활에 굳이 개입해서 처벌하는 이유는 애초에 의사결정능력이 취약한 자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려는 것이 취지이지 않은가. 기존 판례는 의사결정능력이 취약한 미성년자 등 중에서도 간음행위 자체를 착오할 정도로 의사결정능력이 거의 미약한 미성년자 등만을 보호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동기에 착오가 있어 간음행위를 하게 되는 것 역시 간음행위 자체를 기망당해 간음행위 하는 것만큼이나 미성년자 등의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능력 발달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줄만한 행위라고 볼 수 있고, 의사결정능력이 취약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이다. 처벌 대상 행위태양의 규정은 입법재량에 속하는 문제인 만큼 간음행위 동기 착오의 경우도 반드시 처벌 대상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성년자 등의 성적 보호를 위해 굳이 형법적으로 규율한다면, 당장 위 2001도5074 판례에서 성교 대가로 돈을 준다고 기망당해 성행위를 하는 것 역시 피해자의 의사결정능력이 취약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이도 충분히 보호해야 할 범위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2. ‘위계’의 체계적 해석 문제
두 번째 문제는 종래 판례의 ‘위계’ 해석이 형법 상 다른 ‘위계’의 해석과 체계적으로 정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형법 상 위계란 단어가 쓰이는 죄는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제137조), 위계에 의한 촉탁살인(제253조), 신용훼손(제313조), 경매입찰방해(제315조)가 있다. 이중 위계촉탁살인과 경매입찰방해는 판례도 거의 없고 교과서 상 내용도 거의 없으니 위계공무집행방해와 신용훼손(신용훼손의 구성요건은 업무집행방해에서도 그대로 준용된다)의 위계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위계 공무집행방해에서의 위계 : 83도1864>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에 있어서의 소위 위계라 함은 행위자의 행위목적을 이룩하기 위하여 상대방에 오인 착각 또는 부지를 일으키게 하여 그 오인 착각 또는 부지를 이용하는 것
<신용훼손의 위계 : 2006도3400>
‘위계’라 함은 행위자의 행위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상대방에게 오인·착각 또는 부지를 일으키게 하여 이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국가적 법익을 침해하는 죄인 공무집행방해죄나 개인적 법익을 침해하는 죄인 신용훼손이나 위계의 의미 해석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두 죄의 ‘위계’에 관해서는 특별히 착오의 대상을 한정하는 쟁점이나 판시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이 죄들과 위계에 의한 미성년자 등 간음의 죄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착오의 대상에 관한 해석이 달라진다고 볼 수는 있지만, 위 판례에서의 위계 해석을 보았을 때 문언적으로도 착오의 대상을 한정해야 할 이유가 보이지는 않는다. 문언적으로는 상대방에게 오인 착각 또는 부지를 일으키는 것이고, 그 오인 등은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리는 원인이 되면 충분한 것이지 이 때 착오의 대상이 한정되어야 할 이유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죄에서 위계를 위와 같이 해석했다면, 같은 ‘위계’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위계에 의한 미성년자 등 간음에서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달리 해석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종래 판례는 좁게 해석했으므로 체계적 정합성 문제가 있다. 종래 판례에서는 간음행위에 이르는 동기를 ‘간음행위와 불가분적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는 다른 조건’으로 보아서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리는 원인이라고 보지 않은 것이지만, 그 이유는 완전히 납득하기 어렵다.
3. 별론 : 구 혼인빙자간음죄와의 비교
그리고 이것은 별론인데, 지금은 폐지된 ‘혼인빙자간음죄’와 비교해도 균형이 맞지 않는다.
(구) 형법 제304조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로써 음행의 상습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구 형법 제304조, 혼인빙자간음죄는 결혼을 약속할 것이라면서 속이고 성관계를 맺는 경우를 처벌했다. 형법이 구성요건을 규정하면서 ‘A하거나 기타 B로써’라고 하는 것은 보통 A를 B의 구체적인 예시로 드는 것이므로 구 혼인빙자간음죄는 혼인의 빙자를 위계의 구체적인 예시로 명시한 것이다. 그런데 혼인의 빙자, 즉 혼인하겠다고 속이는 것은 간음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간음행위에 이르게 된 동기에 착오를 일으키는 것이 분명하다. 결국 우리 형법에서는 간음행위에 이르는 동기에 착오를 일으키는 것을 위계에 해당한다고 보고 처벌하는 조항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혼인빙자간음죄는 현재 사라졌다.(정확히는 그 죄에서 ‘혼인을 빙자하여 간음’ 부분은 위헌 결정을 받았고 ‘기타 기망으로 간음’ 부분은 법령 개정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비록 위헌 및 폐지로 그 법률이 사라졌지만 그것은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차별적 요소가 있어서였지 위계의 개념이 잘못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위계에는 그 행위에 이르게 된 동기에 착오를 일으키는 것도 포함된다는 취지는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게다가, 혼인빙자간음죄가 구시대의 산물이라고 해도 성인에 대해서도 간음행위에 이르게 된 동기에 착오를 일으켜서 간음행위를 하게 된 것도 형법적으로 규제하고 있었던 것이 형법의 태도였는데 미성년자 등의 경우 그 대상을 좁힌다는 것은 최소한 일관된 취지의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결론
이전 판례의 태도가 불합리한 측면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위계의 해석을 바꾼 것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판례의 태도일 때 최소한 내적 정합성은 확보되기 때문이다.
생각나는 것
판례의 해석이 타당한 이유는 위에서 쓴 것과 같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문제점이 몇 가지 있다. 이것은 해석 문제가 아니라 조문 자체에 내재하는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있는 법’ 대신 ‘있어야 할 법’에 관한 생각이다.
첫째는 개인의 사적 영역에서 처벌할만한 위계와 그렇지 않은 위계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위계가 사용된 다른 죄들은 공무집행방해죄와 신용훼손(업무집행방해)죄 인데 이 죄가 문제되는 건 공적 영역 또는 사회적 영역으로 최소한 사적 영역은 아니다. 이런 공적 영역에서는 통용되는 행위규범이 있으므로 문제가 되는 위계를 구분해내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공공기관에 허위사실을 신고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위계이고 다른 것은 상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적 영역에서 감정적 교류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사소한 거짓말과 속이기를 한다. 사적 영여겡서 모든 거짓말이 비난받을만한 것은 아니다. 물건 사면서 다시 올 생각이 없으면서 ‘다음에 또 올게요. 건강하세요.’ 해서 주인이 덤을 줬다고 위계로 물건을 취득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인간의 내면 영역은 칼같이 구분하기 쉽지 않다. 판례의 사안에서는 너무 명백히 객관적인 것을 속였기 때문에 위계로 인한 동기의 착오를 인정할 수 있었지만 이런 경우였으면 어땠을까. 사실 열렬히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만을 미치도록 사랑한다’고 말하고 상대방이 그 말에 감동받아 성관계를 했다면 이건 간음행위에 이르게 된 동기에 착오라고 봐야할까. 그렇다면 이런 경우를 조문이 상정하는 가벌적 상황이라고 봐야 할까. 물론 위계로 미성년자 등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는 상황은 방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형법적으로 규율하기에 사적 영역의 문제는 어려운 것 같다.
둘째는 조문 상 간음과 추행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영근 교수님은 형법 총론 강의하면서 이런 식의 조문들을 극히 싫어하셨다. 현 조문대로라면 위계로 미성년자 등을 간음했을 때와 추행했을 때 같은 법정형이 적용되는데, 둘 다 잘못된 것이라도 간음과 추행은 그 잘못된 정도가 분명히 다르다. 물론 실제 선고 시에 고려하긴 하겠지만 불합리한 면이 있다. 당장 형법 제305조 소위 미성년자 의제강간 조문만 해도 앞 조문을 준용하면서 간음과 추행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이런 것은 논쟁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한 입법기술적인 문제일텐데 잘 다듬어지면 좋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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