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법

[사건과 법] 백소령 사건

Glox 2024. 5. 11. 14:55

 

군부대에 소령을 사칭하는 사람이 나타나 총기를 가져갔음에도 그 사람의 정체와 총기의 행방까지 모두 알 수 없어 미스테리한 사건으로 유명한 소위 '백소령 사건'

 

2007년경 초병을 차로 치어서 총기를 탈취한 사건은 대형 사건이기는 했지만 미스터리한 것은 아니었는데 백소령 사건은 의문의 남자가 소령의 군복과 계급장은 어떻게 구했는지, 부대 내 사정을 자연스럽게 말했다는데 그것은 어떻게 안 것인지, 대대적인 검문과 수색에도 불구하고 잡히지 않았고 총기의 행방까지 알 수 없어 지금도 많은 의문을 일으키는 사건이다.

 

이처럼 사건 자체도 흥미로운데 의외로 이 사건은 꽤 중요한 형법 판례를 남긴 사건이다.

 

위 사건으로 다시 돌아가보면 3.에 의문의 남자가 K2 소총을 하나 빌려달라고 해서 가져갔다는 내용이 나온다. 구체적으로는 당시 의문의 남자는 부대의 소초 안에 들어가서 당시 소초장인 남 소위에게 브리핑을 듣다가 순찰을 돌테니 K2 소총을 빌려달라고 하고는 남 소위에게서 K2 소총을 받아서 갔다고 한다.

 

남에게 함부로 건네서는 안되는 물건인 총기를 넘겨준 소초장 남 소위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감이 올 것이다. 그렇다. 남 소위는 곧바로 형사재판으로 넘겨졌다. 적용된 죄목은 실수로 총기를 잃었으니 군형법상의 군용물분실죄였다.

 

그런데, 대법원에서 남 소위는 군용물분실죄에 대하여 무죄판결을 받는다.

 

 

 

[1] 형벌법규의 해석은 엄격하여야 하고 명문규정의 의미를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지나치게 확장해석하거나 유추해석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허용되지 않는다.
[2] 군형법 제74조 소정의 군용물분실죄라 함은 같은 조 소정의 군용에 공하는 물건을 보관할 책임이 있는 자가 선량한 보관자로서의 주의의무를 게을리 하여 그의 '의사에 의하지 아니하고 물건의 소지를 상실'하는 소위 과실범을 말한다 할 것이므로, 군용물분실죄에서의 분실은 행위자의 의사에 의하지 아니하고 물건의 소지를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며, 이 점에서 하자가 있기는 하지만 행위자의 의사에 기해 재산적 처분행위를 하여 재물의 점유를 상실함으로써 편취당한 것과는 구별된다고 할 것이고, 분실의 개념을 군용물의 소지 상실시 행위자의 의사가 개입되었는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군용물의 보관책임이 있는 자가 결과적으로 군용물의 소지를 상실하는 모든 경우로 확장해석하거나 유추해석할 수는 없다.
[3] 피고인의 의사에 의한 재산적 처분행위에 의하여 상대방이 재물의 점유를 취득함으로써 피고인이 군용물의 소지를 상실한 이상 그 후 편취자가 군용물을 돌려주지 않고 가버린 결과가 피고인의 의사에 반한다고 하더라도 처분행위 자체는 피고인의 하자 있는 의사에 기한 것이므로 편취당한 것이 군용물분실죄에서의 의사에 의하지 않은 소지의 상실이라고 볼 수 없다.
대법원 1999. 7. 9. 선고 98도1719 판결

 

 

대법원은 남 소위를 군용물분실죄로 처벌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상 유추해석금지원칙에 위배되어서 허용될 수 없다고 보았다

 

 

죄형법정주의

 

죄형법정주의란 간단히 말해 "법에 죄로 정해지지 않은 행위는 처벌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국가권력과 형벌권이 군주의 권한이던 때, 형벌이라는 가장 강력한 제재 수단이 자의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막고자 국가형벌권의 자의적인 행사와 남용으로부터 국민이 부당하게 처벌되는 것을 막기 위한 원칙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형법은 사람이 대중의 요구, 권력자의 심기불편으로 인하여 언제 어떻게 처벌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금지하고, "법"에 규정된 것으로만 처벌하도록 하였다. 그것이 죄형법정주의이다. 죄형법정주의 원칙이 없다면 개인은 법에서 따로 금지한 것이 없어서 행위를 하였는데 국가 혹은 대중이 자의적으로 "그건 나쁜짓이다."라고 하여 처벌을 내릴 위험이 있고, 개인은 언제 자신의 행동이 죄로 규정될지 몰라 안전할 수 없는 사회가 될 수 있다.

 

이어서 유추해석금지의 원칙이란 죄형법정주의의 파생 원칙으로 형법 규정상 명문의 의미를 넘어 그 문언의 의미를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유추하여 해석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말한다. 죄형법정주의에서 말했듯 법에서 죄로 정하지 않은 것은 벌할 수 없지만, 국가권력은 언제든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네가 한 행위를 죄로 규정한 법은 없지만, 다른 처벌조항의 취지나 용어가 대충 비슷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네가 한 행위도 충분히 처벌해야 한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유추해석금지의 원칙은 이런 식으로 죄형법정주의를 사실상 회피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원에 자동차를 타고 진입하면 처벌한다."는 법이 있다고 할 때, 승용차를 타고 공원에 들어오면 처벌된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런데 누군가가 "공원에 자전거 타고 진입하는 것도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주장한다. 공원에 자전거가 다니면 보행자들 불편해지는 건 똑같고, 자전거도 자동차처럼 바퀴 달렸고 속도도 빠르니 충분히 해당할 수 있지 않냐는 논리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동차"를 규제했던 법에는 없던 내용을 추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이 해석은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을 벗어나는 것이고, 이렇게 함부로 유추적용해서 죄형법정주의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형법에서 유추해석은 금지되는 것이다.

 

 

 

 

속아서 잃은 건 분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백소령 사건에서 총을 잃은 남 소위는 어떻게 판결을 받았을까. 

 

백소령 사건 당시 군형법
제74조 (군용물 분실) 
총포ㆍ탄약ㆍ폭발물ㆍ차량ㆍ장구ㆍ기재ㆍ식량ㆍ피복 기타 군용에 공하는 물건을 보관할 책임이 있는 자로서 이를 분실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백소령 사건이 있었던 1997년 당시의 군형법이다. 한문어투가 바뀐 것 외에는 현재도 내용은 똑같다. 남 소위는 의문의 남자에게 K2 소총을 넘겨주는 바람에 총포를 상실한 것이다. 군검찰은 그 상실을 군용물 분실로 보고 기소했고, 실제로 2심까지는 "군용물 보관책임이 있는 자가 과실로 군용물을 상실하면 그건 군용물 분실이 맞다."라고 보아 유죄로 판단했다.

 

그런데 대법원은 분실의 의미를 엄격히 제한적으로 해석하였다. 문언적으로 분실이란 "나는 물건을 두고 갈 생각이 없었는데 실수로 두고 가서 찾지 못하게 된 것"을 말한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남에게 물건을 줄 생각으로 준 것이라면(속아서 줄 생각을 한 것이라 하더라도), 남이 물건을 가져가서 찾지 못하게 되어도 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판결문의 표현으로 옮기면 "군용물분실죄에서의 분실은 행위자의 의사에 의하지 아니하고 물건의 소지를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며, 이 점에서 하자가 있기는 하지만 행위자의 의사에 기해 재산적 처분행위를 하여 재물의 점유를 상실함으로써 편취당한 것과는 구별된다고 할 것"인 것이다. 

 

즉 대법원은 분실이란 "보관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물건을 잃어버린 경우"를 뜻하며, 여기에는 "속임수로 인하여 물건을 넘겨주는 행위를 한 경우"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남 소위가 K2 소총을 잃은 것은 속임수로 인한 상실이지 분실은 아닌 것이다.

 

물론 남 소위는 K2 소총을 달라는 의문의 남자의 행위가 수상함에도 이를 확인하지 않았고, 총기를 함부로 넘겨주면 안 된다는 것도 군대의 일반적인 상식인데도 이를 어겼으므로 총을 잃은데 과실이 있고, 총을 반환받았어야 할 자신의 의사와 다르게 결국 총을 상실했으니 사실상 분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2심까지의 논리).

 

하지만 유추해석금지의 원칙의 핵심은 문언의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분실'이란 물건의 점유를 잃는 줄도 모르고 점유를 잃어야 하는 것인데(의사에 의하지 아니하고 소지를 상실), 결국 못 돌려받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직접 물건의 점유를 넘겨주는 것(의사에 기한 처분행위)은 결국 분실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군형법은 모든 종류의 군용물 상실이 아니라 분실만을 처벌하고 있었으므로 남 소위는 군용물분실죄에 관하여 무죄판결을 받게 되었고, 이 판례는 죄형법정주의 및 유추해석금지원칙과 관련하여 중요한 판례로 남았다.

 

 

나쁜 놈들은 그냥 처벌하면 안 되나?

 

죄형법정주의 및 유추해석금지원칙이 적용된 사건을 보면 범죄자들이 법의 맹점으로 빠져나간듯하여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나쁜 놈들인건 명확한데 비슷한 법 적용해서 처벌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막기 위한 중요한 원칙이다. 남 소위는 군용물분실죄에 관해서 처벌받지 않았을 뿐, 징계 등으로 전역되었을 것은 확실하다. 

 

형법이 함부로 경계를 넘어 누군가의 자유를 억압한다면, 그 법은 다음에는 언제든지 이것도 나쁜 것 "같다"고 말하며 누구든 억압할 수 있다. 위 공원 자동차 진입 금지 사례를 다시 가져오면 함부로 유추해석하도록 둔다면 오늘은 자전거를 처벌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내일은 손수레를 끌고 오는 사람도, 그 다음에는 장애인용 전동휠체어를 타고 오는 사람도 처벌될 수 있게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 이는 결국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사회를 만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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