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법

[사건과 법]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 작가 교체 사건

Glox 2024. 5. 15. 20:11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 18권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텔레마코스는 거짓말 하지 말라고 외쳤는데 이 다음 권인 19권은 거짓말처럼 다음과 같은 그림체로 출간되어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90년대생이라면 학창 시절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 시리즈를 열렬히 애독했을 것이다. 학교 도서관에서도 보고 책 산 친구한테서도 빌려보고, 이 덕분에 한국인들이 웬만한 유럽인들보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잘 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한창 진행중이었던 18권이 끝나고 보통의 발매 주기를 넘어도 19권이 안 나오더니 갑자기 그림 작가가 바뀐 채 19권이 나오게 되었다. 기존 그림체는 2024년 현재로도 회자되는 매력적인 그림체였는데, 새로운 그림체는 그에 비하면 교과서 그림체마냥 딱딱하기도 했고 18권을 이어온 그림체가 바뀌니 그 위화감이 커 독자들의 구매욕구를 뚝 떨어뜨렸고 결국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 시리즈의 인기는 수직낙하하였다.

 

왜 출판사는 갑자기 그림 작가를 교체한 걸까?

 

 

 

출판사 - 홍은영 작가 분쟁

 

18권 발매즈음 이미 기존 그림작가였던 홍은영 작가와 출판사는 분쟁을 겪고 있었다. 홍은영 작가와 출판사가 맺은 지적재산권 양도계약의 범위에 관하여 이견이 발생하여 이에 대해 다투고 있었는데, 그 와중 더 큰 문제가 발견되었다.

 

출판사가 홍은영 작가에게 출판부수를 속이고 약 40억원의 인세를 미지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출판사와 홍은영 작가는 책의 출판 부수에 의한 총 정가의 7%를 인세의 총액으로 하여 지급하도록 계약했다.

 

그런데 2004. 1.경까지 이 책의 출판부수는 1,000만부를 넘었음에도 출판사는 360만부만 출판된 것으로 되어있는 출고현황표를 작성하고는 이에 해당하는 약 20억원의 인세만 홍은영 작가에게 지급한 것이다.

 

1,000만부를 기준으로 하면 원래 홍은영 작가에게 주어야 할 인세는 60억원이었으니 약 40억원을 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리즈는 90년대생들의 베스트셀러였던만큼 당시 일간지 보도상으로도 이미 1,000만부를 넘겼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으니 360만부만 출판되어 이에 해당하는 인세만 지급하였다는 출판사의 말이 수상할 수밖에 없고, 홍은영 작가는 출판사측 사람들을 사기죄로 고소한다.

 

출판사측은 "계약 종료 후 정산해서 40억원도 줄 것이었다(편취 의사 부인).", "계약내용상 인세 1/3을 우선 지급하기로 되어 있어 1/3에 해당하는 출고현황표만 보낸 것이고 작가도 이를 안다(기망행위 부인).", "계약이 종료되어야 인세 지급시기가 도래하므로 작가에게는 아직 손해가 없다(피해자 재산상 손해 부인)." 등의 주장을 하였으나 법원은 이를 모두 배척하였다.

 

그런데 출판사측은 또 한가지 중요한 주장을 한다.

 

"우리가 작가에게 발매 현황을 속였다 하더라도, 그로 인하여 작가로부터 돈을 받았거나 작가가 나머지 인세 40억원을  받지 않겠다고 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작가가 나머지 인세가 있는지 몰라 이를 달라고 하지 않은 것 뿐이므로 사기가 아니다."

 

 

사기죄의 구성요건

 

출판사측의 주장은 궤변인 것 같지만 말이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처분행위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사기죄 실행행위의 구성요건은 1) 기망행위 2) 피해자의 착오 3) 피해자의 처분행위 4) 재물의 교부 또는 재산상 이익의 취득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기죄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범죄자가 "좋은 투자처가 있어. 지금 투자하면 2배야."라고 피해자에게 이야기해서(기망행위) 이에 속은 피해자가(피해자의 착오), 범죄자에게 "나도 거기에 투자할게."하고 돈을 맡기고(피해자 처분행위), 범죄자는 그 돈을 가지고 도망치거나 돌려주지 않는다.(재물의 교부 또는 재산상 이익의 취득)

 

즉, 피해자가 재물 등을 건네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물론 채무 면제에 의한 처분행위도 인정되기는 하나(2012도1011), 어쨌든 피해자가 의식적으로 직접 재물을 주거나 자기 재산을 포기하는 것이 '처분행위'라고 볼 여지가 있다. 채권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는데 '처분'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출판사측의 이 주장은 대법원까지 가게 되었고, 사기죄 관련 중요한 판례를 남기게 되었다.

 

[1] 사기죄는 타인을 기망하여 착오를 일으키게 하고 그로 인한 처분행위를 유발하여 재물·재산상의 이득을 얻음으로써 성립하고, 여기서 처분행위라 함은 재산적 처분행위로서 피해자가 자유의사로 직접 재산상 손해를 초래하는 작위에 나아가거나 또는 부작위에 이른 것을 말하므로, 피해자가 착오에 빠진 결과 채권의 존재를 알지 못하여 채권을 행사하지 아니하였다면 그와 같은 부작위도 재산의 처분행위에 해당한다.
[2] 출판사 경영자가 출고현황표를 조작하는 방법으로 실제출판부수를 속여 작가에게 인세의 일부만을 지급한 사안에서, 작가가 나머지 인세에 대한 청구권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는 착오에 빠져 이를 행사하지 아니한 것이 사기죄에 있어 부작위에 의한 처분행위에 해당한다고 본 사례.
대법원 2007. 7. 12. 선고 2005도9221 판결

 

 

피해자가 기망행위로 착오에 빠져서 직접 재물을 건네주거나 자신의 채권을 포기하였다면 그것은 작위에 의한 처분행위이다. 그런데 피해자가 기망행위로 자신의 채권을 알지도 못해 행사하지도 못하고 있었다면 그건 속았기 때문에 행사하지 못한 것이므로 부작위에 의한 처분행위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형법각론 교과서 사기죄 부분에서 '부작위에 의한 처분행위'라는 목차로 항상 나오는 판례로 남았다.

 

이 주장에 대하여 법리적으로 밝힐만한 일이라서 대법원까지 갔을 뿐이지, 이 사건에서 1심부터 대법원과 똑같이 부작위에 의한 처분행위를 인정해서 출판사측 사람들에게 모두 유죄를 선고하였다. 

 

그 이후

출판사측 사람들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사기) 및 형법상 사기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집행유예가 가벼워 보일 수는 있지만, 대표 외 출판사 직원들은 가담의 정도가 적었고, 관련 민사소송 중 출판사측이 37억원을 공탁하여 홍은영 작가가 이를 수령하였고, 무엇보다 홍은영 작가가 처벌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집행유예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 시리즈 기존 출판 부분 및 그 시리즈가 원작인 올림포스 가디언 방영 및 관련하여서도 분쟁이 있었는데 출판사측은 여기서도 패소하였다(서울고등법원 2007. 2. 7. 선고 2005나20837 판결). 그래서 출판사측은 홍은영 작가의 그림체로 된 시리즈는 발간할 수 없게 되었다.

 

 

홍은영 작가는 기존 출판사와 갈라서고 따로 그리스로마 신화 책을 낸다. 이 시리즈는 상업만화의 성격이 옅어져서 홍은영 작가가 신화작업을 책임지고 마무리하기 위해 출판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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