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의 조약/협정의 역사에 관한 글을 읽고 있었다. 2000년대 이후 그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이라면 한미 FTA와 쇠고기 협상을 빼놓을 수 없다. 광우평 파동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촉발시키기도 했고 우리나라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친 부분이다. 관련 내용 찾던 중 법률 문서에서 분쟁을 예방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을 암시하는 이야기를 발견했다.
한미 쇠고기 추가협상 브리핑에 따르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과정에서 미국 육류작업장에 식품안전 관련 문제가 생기면 그 작업장은 중단조치에 쳐해질 수 있었다. 영어로는 may be suspended라고 한다. 두루뭉실하게 생각하면 큰 문제가 없을 수 있다. 수입 쇠고기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 쇠고기를 다루는 작업장은 중단조치 되는 것이고, 문제의 쇠고기는 수입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막연히 관념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생각한다면 분쟁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추가협상 브리핑에서 말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문제가 생겨서 작업장이 중단조치까지 이루어지기 위해서 '누가 중단조치를 요청'할 수 있고 '누가 중단조치를 실시'하는지 빠져있어서 실제로 중단조치되기까지 법적 분쟁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한국정부에게 중단조치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명확하지 않다면 미국정부가 중단조치에 나서도록 그저 요청하는 수밖에 없고, 중단조치를 요구한다고 해도 미국정부가 중단조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중단조치를 매우 느리게 해서 해당 작업장의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면 실효성을 거둘 수 없다. 그저 법적 분쟁이 계속되는 상태로 문제 상황을 놔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추가협상단은 해당 작업장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작업중단을 미국 측에 요구할 수 있도록 하고, 중단조치 시 작업장 작업이 중단되도록 합의하였다고 발표했다. 그 뒤의 합의의 변동과정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 부분에 관한 협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산 쇠고기 및 쇠고기 제품 수입위생조건>
23. 검역 검사 과정 중 한 로트에서 식품 안전 위해를 발견하였을 경우, 한국정부는 해당 로트를 불합격 조치할 수 있다. 한국정부는 미국정부에 이에 관하여 통보하고 협의하여야 하며 적절한 경우 개선조치를 요청할 수 있다. 특정위험물질이 발견될 경우, 미국 식품안전검사청은 해당 문제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를 실시할 것이다. 해당 육류작업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여전히 수입검역검사를 받을 수 있다. 다만, 한국정부는 해당 육류작업장에서 이후 수입되는 쇠고기 및 쇠고기 제품에 대한 검사 비율을 높일 것이다. 동일 제품의 동등 이상 물량 5개 로트에 대한 검사에서 식품안전 위해가 발견되지 않았을 경우, 한국정부는 정상 검사절차 및 비율을 적용해야 한다.
24. 동일한 육류작업장에서 생산된 별개의 로트에서 최소 2회의 식품안전위해가 발견된 경우, 해당 육류작업장은 개선조치가 취해질 때까지 중단조치될 수 있다. 해당 육류작업장에서 생산되고 중단일 이전에 인증된 쇠고기 및 쇠고기 제품은 여전히 수입검역검사를 받을 수 있다. 작업장은 미국정부가 개선조치가 완료되었음을 한국정부에게 입증할 때까지 중단조치된 상태로 남는다. 미국정부는 육류작업장의 개선조치와 중단조치가 해제된 일자를 통보해야 한다. 한국정부는 미국에 대한 차기 시스템 점검 시 해당 작업장에 대한 현지점검을 포함시킬 수 있다.
우선 한국 정부는 검역 과정에서 한 로트(단위 제품)에서 식품 안전 위해, 즉 문제를 발견한 경우 개선조치를 요청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작업장에서 2회 문제가 생긴 경우 중단조치될 수 있고 개선조치가 완료될 때까지 중단조치된 상태로 남는다. 개선조치 완료되기 전까지 중단조치 된다는 점에서 한국정부에게 유리한 부분은 있는 것 같지만 브리핑에서 말한 주체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한국정부가 중단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 보이고, 중단조치 요구 시 즉시 미국정부가 중단조치에 나서야 하는 의무가 있는지도 불확실하다. 브리핑에서는 우리측 요구가 있으면 미국이 즉시 중단조치를 시행하도록 합의하였다고 하는데 국가법령정보센터의 위생조건의 문언만으로는 단언할 수 없다.
법률 문서의 규정 방법론
쇠고기 협상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효과(작업장은 중단조치 된다)에 관해서만 규정할 뿐, 주체와 절차가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효과에 관한 내용만 있으면 문법상이든 내용상이든 관념적으로 틀린 점은 없기 때문에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주체'와 '절차'를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체는 권한 또는 의무의 변동이다. 주체가 어떻게 규정되느냐에 따라 권한이 생길 수도 있고 의무가 생길 수도 있다. 또한 절차는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버팀목이다. 절차가 불명확하면 권한이 있어도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불필요한 잡음이 많아지고 그동안 문제는 방치된다. 그러므로 법률 문서를 작성한다면 기계적으로 '주체', '절차' 두 가지를 중심으로 실현방법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겠다.
'로스쿨생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백 공격으로 해고될 수 있다 (2) | 2024.04.09 |
---|---|
로스쿨 면접 문제 : 의사결정과 이익의 충돌(자작4) (0) | 2024.03.29 |
의외로 범죄 피해자도 처벌될 수 있다 (2) | 2024.03.07 |
변호사시험 헌법 선지 정리 (0) | 2024.03.03 |
술 마시고 말 타면 음주운전? (0) | 2024.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