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생 생각

동일 사건의 쌍방 가해행위에 대한 민법 제496조 적용

Glox 2025. 1. 4. 09:07
민법
제496조 (불법행위채권을 수동채권으로 하는 상계의 금지)
채무가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것인 때에는 그 채무자는 상계로 채권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상계는 당사자 쌍방이 서로 같은 종류를 목적으로 한 채무를 부담한 경우에 서로 같은 종류의 급부를 현실로 이행하는 대신 어느 일방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그 대등액에 관하여 채권과 채무를 동시에 소멸시키는 것이다(2010101394).

 

즉 내가 상대방에게 100만원을 빌려줬고, 상대방이 나에게 50만원을 빌려줬다면 갚아야 할 때 내가 100만원을 받고 거기서 다시 내가 50만원을 상대방에게 주는 대신 상대방이 나에게 50만원만 주는 것으로 할 수 있다이러면 복잡한 과정을 거칠필요 없이 계산이 간편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은 애초에 50만원을 공제하고 주므로 내가 100만원 받고 50만원은 돌려주지 않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계는 항상 허용되는 것은 아니고 상계가 금지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민법 제496조의 불법행위을 수동채권으로 하는 상계의 금지이다. 이 부분은 로스쿨 수업 때의 교수님이나 강사들이 거의 일률적으로 이렇게 설명한다.

 

 

A B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A가 채권자이고 B가 채무자이다), B가 돈을 갚을 구석이 보이지 않자 A B의 뺨을 몇 대 치거나 B의 물건을 부순 다음(B에게는 A에 대하여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채권이 발생하게 된다) “야 갚아야 할 돈에서 까라.”라고 말했다. 민법 제496조는 이러한 상황에 까라고 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워낙 직관적인 설명이고 사회상규와도 부합하기 때문에 적절한 설명이다. 각종 기본서나 주석서 또한 1) 보복적 불법행위(위에서 A가 저지른 짓) 유발을 방지하고 2) 피해자가 현실의 변제를 받게 하기 위한 것이 취지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위에서 본 사례가 직관적이어서 그렇지 위 사안과 다른 형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데 그런 경우에도 민법 제496조가 취지대로 적용되는지는 의문이다.

 

동일한 사안에 기하여 상호간에 고의의 불법행위 손해배상채권이 발생한 경우, 예를 들어 싸운 경우에도 민법 제496조가 적용되어야 할까? 판례는 그렇다고 본다.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채권을 수동채권으로 하는 상계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며(민법 제496조), 이는 그 자동채권이 동시에 행하여진 싸움에서 서로 상해를 가한 경우와 같이 동일한 사안에서 발생한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채권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다.
대법원 1994. 2. 25. 선고 93다38444 판결

 

서로 싸운 경우 싸움 당사자 쌍방은 상대방에게 고의의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이므로 상호간에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채권을 갖는다. 민법 제496조는 명문으로 채무가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것이기만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이 경우에도 적용되는 것이 타당하므로 일방 당사자는 상계할 수 없다.

 

하지만 첫 사례와는 달리 이 사례는 직관에 어긋나는 요소가 있다. 이 싸움 당사자들을 특별히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위에서 본 민법 제496조의 첫 취지인 보복적 불법행위 유발의 방지는 이미 의미가 없다. 동일한 사안에 기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각 불법행위는 선후를 가릴 수 없고 보복적 불법행위라고 볼 수도 없다. 두 번째 취지는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 싸움의 쌍방 당사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민법 제496조를 적용하면 동시에 가해자를 보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러한 경우에도 상계가 안 되는 것일 뿐 채권의 행사는 가능하다. 만약 일방 당사자가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상대방은 상계 주장을 하지 못할 뿐 결국 반소청구하여 자신도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때까지 민법 496조를 적용하여 상계금지를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딱히 일방을 보호해야 할 이유도 없는 사안인데 간편하게 상계를 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위 판례는 민법 제496조의 문언에 따른 결과이다. 민법 조문은 채무가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것이기만 하면 민법 제496조가 적용된다고 보지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적용 여부를 달리해야 한다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민법 제496조의 취지와는 조금 다른 결론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취지는 문언에 대하여는 보충적 해석에 그친다. 위와 같은 나의 생각과는 별도로 판례의 태도가 법 해석 및 법적 안정성 관점에서 옳다.

 

 

단상

 

민법 제496조는 고의의 불법행위에 대한 강한 사회적 비난을 반영한 규정이다. 피해자가 현실적으로 손해를 회복할 수 있도록 보장하면서, 보복적 불법행위의 악순환을 끊고자 한다. 그러나 동일한 사안에서 상호간에 발생한 고의의 불법행위 손해배상채권에까지 이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과연 법문의 취지, 그리고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 왜 우리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채권을 수동채권으로 하여 상계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가? 이 규정은 단순히 피해자가 현실적으로 손해를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중점인가, 아니면 가해자의 행위에 대한 사회적 응징과 비난이 중점인가? 만약 후자의 측면이 강하다면 동일한 사안에서 상호 발생한 불법행위 손해배상채권의 경우에는 이러한 비난과 응징의 논리가 무의미해진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질문이 떠오른다. 위 문제상황에서 민법 제496조는 분쟁의 간편한 해결이라는 원칙과 충돌할 여지가 없는가? 서로 간의 손해배상을 상계함으로써 간편하고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오히려 법이 촉진해야 할 방향일 수 있다. 상계 금지가 오히려 불필요한 소송이나 반소로 이어진다면, 실질적 손해 회복보다 절차의 복잡성만 남게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상호간에 상계계약으로 비교적 간편하게 해결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채무의 채권자가 그 채권을 자동채권으로 하여 상계를 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위 사안에서는 상호 불법행위이기 때문에 자신의 수동채권도 고의의 불법행위에 기한 것이라 불가능하다). 그러나 서로 싸워 갈등이 생긴 자들이 상계의 합의를 하는 것을 상정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일방이 상계해버리면 더 이상 피차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입장에서 더 갈등이 격화되지 않을 수는 있다.

 

결국, 민법 제496조는 문언의 명확성과 취지 사이에서 어딘가 모순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에 관해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법이 현실의 복잡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당위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 글은 단순한 트집잡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스쿨 시절 돈 빌려준 사람이 채무자 폭행하고 까라고 하는 사례 하나로만 법조문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풍부하게 생각해보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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