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계약이란 당사자들의 권리와 의무를 미리 구체적으로 정하는 것이다. 매매계약이라면 매매 목적물과 인도 시기 및 가격을 정하고, 도급계약이라면 어떠한 일을 언제까지 완성하고 어떤 결과물을 인도할 것인지 정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계약은 계약 체결 당시 당사자들이 해야 할 일이 명확히 정해져있다. 간단하게 계약서를 쓰는 경우도 있지만 좀 규모가 큰 계약들은 계약서 분량도 많다.
그런데 근로계약은 생각보다 구체적이지 않다. 물론 근로시간, 임금, 휴가 등 근로조건이 많이 쓰여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근로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업무의 내용은 보통 구체적으로 쓰여있지 않다. 일반 회사원이라고 했을 때 무슨 보고서를 쓸지, 어떤 클라이언트를 만날지, 어떤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이 적혀있지는 않다. 단지 대략적인 직무를 적어둘 뿐이다. 당장은 이 회사가 A 분야 사업을 하고 있지만 상황이 바뀌면 이 회사원은 B 사업을 맡아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근로계약 체결 당시에는 정해지지 않은 일들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왜 근로계약은 많은 것을 특정하지 않는 것일까.
조직이론의 관점에서 왜 근로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거꾸로 탐색해보면 근로계약이 그러한 느슨한 계약인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장이 아닌 조직이 존재하는 이유
경제학에서 시장은 강력한 자원배분 장치이다. 가격 메커니즘은 자율적으로 모든 것을 조정하고, 시장을 통할 때 효율성이 발휘된다. 즉 모든 거래는 필요할 때마다 개인이 매번 시장을 통해서 이루어질 때 가장 효율적이다. 하지만 현실의 경제에서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지 않는다.
모든 것을 시장을 통해 처리하면 되는데 왜 기업이라는 조직이 발생하는 것일까. 코즈의 정리로 유명한 경제학자 로널드 코즈가 제기한 의문이 바로 기업이라는 조직이 발생하는 이유였다. 코즈는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이라는 개념을 통해 현실을 설명했다. 코즈의 통찰은 이상적인 시장과 달리 현실의 시장은 이용하는데도 비용이 든다는 것이었다. 적절한 상대방을 찾는 것, 가격을 알아보는 것, 상대방과 가격을 협상하는 것, 계약 이후 계약이 제대로 이행되는지 감시하는 것, 계약을 지키지 않는 상대에게 제재를 가하는 것에는 모두 비용(꼭 금전적 비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품이 든다는 것이다.)이 발생한다. 오늘날 이를 넓은 의미에서 거래비용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한 사업가가 자신이 해야 할 일 일부를 남에게 맡기려고 한다. 이상적인 시장이라면 아래와 같이 거래할 수도 있다.
아침에 이메일 4개를 쓰도록 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오후에는 회의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맡기는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며, 퇴근할 즈음에는 그 날 매출을 정리할 일을 맡길 사람과 계약을 체결한다. 그 와중에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해 새로운 계약을 체결해야하거나 계약 내용을 수정하여야 할 수도 있다. 이런 방식은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너무 비싸고 번거롭다.
그래서 모든 거래를 시장에 맡겨 거래하는 대신 기업이 직원을 고용해 조직 내로 편입시키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그때그때 사용자가 정하는 장기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는데, 이 경우 위에서 말한 거래비용이 덜 발생하게 된다. 매번 새로운 사람을 찾을 필요도 없고 가격을 협상해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누군가가 내부로 편입된다면, 즉 조직이 생긴다면 매번 개별 거래를 일일이 계약하는 구체적 거래를 하는 대신 일정 범위 내의 결정을 언제든 따르도록 하는 계약만으로 거래비용을 많이 지출하지 않고서도 거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가 매번 구체적인 거래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할 경우 근로계약은 모든 업무를 구체적으로 정해 두는 계약일 수는 없다. 모든 업무를 구체적으로 정해 두는 계약은 곧 다시 매번 시장 거래를 하는 것과 같다.
제한된 합리성이 가져오는 범위의 계약
왜 이상적인 시장과 달리 시장을 이용하는데 거래비용이 발생하는가? 올리버 윌리엄슨의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 개념을 적용하면 거래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합리적으로 행동하려 하지만 완벽하게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고 제한적으로 합리성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한계상 미래에 발생할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그에 따른 최적의 행동을 계산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미래는 항상 불확실하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할지 완벽히 기술할 수는 없다.
아무리 완벽한 계약을 하려 하더라도 다음 해 2월 7일 오전 9시에 발생할 문제를 예상하여 “그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라고 계약을 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음 해 2월 7일 오전 9시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보통 사장이 어떻게 해야할지 결정해서 근로자에게 지시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근로계약이란 미리 정한 범위 내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결정권자가 적절한 대응방안을 정하고 근로자가 이에 따른다는 계약이 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정해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근로계약의 본질
위와 같은 거래비용의 문제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조직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그에 수반되는 것이 근로계약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근로계약의 본질이 무엇인지 실마리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좋은 계약은 가능한 모든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약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근로계약에서는 일정 이상의 구체성이 오히려 거래비용을 올려 오히려 근로계약을 해야 하는 이유를 해쳐버린다.
예를 들어 회사와 근로자가 향후 3년동안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모든 업무를 계약서에 완벽하게 적어두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계약서에 적히지 않은 업무를 해야하는 경우 계약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업을 운영하다보면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발생하고 이에 대응하여야 할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새로운 일을 맡기기 위해서는 다시 거래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결국, 근로계약은 기업이 매번 시장을 통하는 것을 피하고 시장보다 편하게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즉 거래비용을 감소시키기 위해) 체결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업은 일정한 조직적 목적과 미리 정해둔 범위 내에서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 근로자의 노동을 배치하기 위해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만약 발생가능할 상황을 미리 충분히 알 수 있으면 거래비용이 감소하기에 꼭 근로계약으로만 이를 수행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기에 근로계약은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넓은 범위 내에서 사용자가 근로자의 노동력 사용 방법을 결정할 권한을 부여하는 느슨한 계약인 것이다. 그 범위는 반드시 수행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남겨두는 범위이다. 결국 근로계약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여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대비를 하는 대신 현재에는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정해두지 않는 계약이라고 할 것이다.
이전에 작성했던 기업의 핵심 업무에 대한 위탁의 허용 여부와 문제의식을 같이 하는 것인데, 조금 더 조직이론을 깊이 파고들어 정리해보고자 한다.
징계에 관하여 탐구하면서도 조직이 어떻게 성립하는지에 관하여 생각했었는데, 이것도 어느 정도 연결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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